[특별기고] 지영주 KAN-WIN 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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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2000년부터 시카고 지역의 KAN-WIN (여성핫라인)에 재직했고, 2019년 말 사무국장으로 퇴임했다. KAN-WIN은 지역사회의 가정폭력, 성폭력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일라는 비영리 단체로서 억압과 통제로 비롯되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피해자 지원, 교육, 연대 활동으로 지난 30년간 활발히 활동해오고 있다. 그중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창립 초기부터 이어온 옹호/연대사업의 한 주제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 등은 KAN-WIN의 역사 속에서 연대와 협업으로 만난 분들이다.

내가 정의연과 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13년, ‘평화를 위한 외침: 일본군 위안부가 우리에게 남기는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고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정의연 이사장과 함께 노스이스턴 대학 강당에서 가진 첫 강연회부터다. 시카고에서의 첫 행사는 몇몇 보수단체가 행사를 저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해프닝으로 시작되었다. ‘평화’와 ‘정의’을 언급하면 즉각 정치적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이민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 

피해자를 옹호하는 일이 중요한 두 단체의 활동에서 젠더 정의/성평등 실현에 이해를 달리하는 외부의 압력과 비난은 늘 있는 도전이었고, 이에 굴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일해 온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원만하고 짜임새 있게 마쳤던 첫 연대의 경험은 지역 상황을 고려해 경비를 자비로 사용하겠노라며 세심하게 배려한 정의연과 KAN-WIN의 조직력, 시카고 지역 공동체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지가 있어 가능했다.

이렇게 정의연과 맺은 인연이 해를 거듭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정의연 일행과 윤미향 전 이사장, 그리고 피해자인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연대활동에 임하는 모든 이들의 희생적이고, 절제된 모습, 지역 공동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이곳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끼니를 거르고 잠을 아끼며 애쓰는 모습을 나는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어렵게 모인 모금의 힘으로 해외 활동이 가능케 됐다고 자랑스러워하던 모습, 할머니를 보살피느라 사적인 출입조차 자제하는 모습,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 하나의 언론 인터뷰나 교육이라도 더 스케줄을 잡으려던 모습은 동포들을 감동시켰고, 더 훌륭한 연대 활동이 만들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의연은 또한 피해자들에게 ‘피해자 다움’을 기대하던 시대적 우를 넘어 그들이 인권 운동가로 거듭나도록 큰 영감을 주었다.  이를 실현하는 것은 미주 가정폭력/성폭력 운동 단체들이 주목하는 과제이기도 한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 또한 정의연의 활동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 민족 갈등으로 가두어 보는 일부의 시각이 문제의 폭넓은 이해와 운동의 확장에 걸림돌이 되어, 오히려 일본 정부가 바라는 결과만을 초래해 온 것에 반해, 정의연은 이 문제를 인권 회복과 정의를 위한 인류 보편의 의제로 보는 과감한 접근으로 협소한 논쟁을 거두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정의연과의 연대활동을 통해 단지 끔찍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깨닫는 것을 너머, 세계인들이 이 문제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여 다시는 그 어디서도 같은 범죄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에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이 결과로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알지 못했던 한인 및 아시아계 미국인 2세 청년들이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관련 시위와 커뮤니티 행사를 조직하거나 참여했다. 청년들은 자신의 친구, 교수, 교회 목사들을 초청해 거리 시위를 열었고, 음악회와 전시회를 열어 문제를 알렸으며, 대학에 진학해 자신의 연구과제로 삼았다. 

또한,  지역사회 구성원들은 성금 모금을 진행했다. 타민족 여성 폭력 단체에서는 주제 강연, 전시회, 토론회를 열며, 전쟁을 겪은 역사를 함께하는 민족들이 함께 모여 어디에서도 나눌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안전한 공간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공유된 고통의 역사가 서로를 치유하는 특별한 매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과 축적된 리소스는 그동안 정의연과의 연대로 KAN-WIN을 포함한 지역사회 연대망의 땀과 눈물이 있어 가능했다.

공이 크다 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과실을 두고 묵과할 일이 아닌 줄 안다. 그러나 공과를 살피는 의도와 맥락이 혼돈 속에 빠지다 보면 그동안 힘겹게 쌓아온 “위안부” 운동의 궤적을 잃어버리고 나아갈 목적과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정의연과 윤미향 위원의 정의와 평등을 향한 그간의 외침에 비추어 앞으로도 그들이 이 사회에서 바라는 목적이 희석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계속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낮은 곳에서 자신을 버리고 희생을 감수한 무고한 분의 죽음을 애도한다. 정의연의 쉼터를 맡고 계셨던 고 손영미 소장은 직접 만나보진 못했으나 이곳에 방문했던 김복동 할머니와 정의연 분들이 내내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 얘기하던 분으로 기억한다.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던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를 앞으로도 우리 공동체에서 배워 나갈 수 있길 바란다. 김복동 할머니와 수많은 피해자들이 말로 다 남길 수 없었던 바람,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바라는 목표인 인권 회복과 정의를 위한 외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미국은 백인 경찰에 의해서 살해된 흑인 남성의 이야기에 아픔과 분노 속에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 2세들이 그들의 두 조국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기 바란다. 너무 큰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도 인권의 가치를 세우고 지켜가는 멋진 나라로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끝으로, 고 손영미 소장님의 죽음에 심심한 위로를 드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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